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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농이의 일기/아~대한민국

국산 AESE 레이더 개발..그 뒤엔 숭고한 희생과 애국이 있었다

by 도농jk 2020. 10. 10.

한국형 전투기(KFX)의

주요장비인 AESA 레이더

AESA 레이더는 공중전에서

적기를 먼저 식별해 

지상 타격 목표를 찾는데

필수적인 장비.

 

1000개의 송수신 장치를

독립적으로 작동시켜

여러 목표물을 

동시에 탐지 추적할수 있다.

전투기가 1000개의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 AESA 레이더의

국내 개발과정은 고난이었다. 

한국정부는 2015년 미국에

기술이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여기서 한국정부는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개발을 시작했었다.

 

 

결과만 얘기하니

쉬워 보이지만,

사실 국산 전투기 개발 과정은

무척 험난했습니다.

 

 

당시 기술지원을 위해

한국에 파견된

미국의 록히드마틴

기술진은 채 10년도 되지 않는

개발일정에 대해

“손에 장을 지지겠다”는

한국식 농담까지 던지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

예산을 더 확보하든지

인원을 대폭

충원하지 않으면

일정을 맞출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가 덮쳤습니다.

1달러당 900원이던

환율이 1개월 만에

2000원으로 올라 개발비용이

폭증했습니다.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연구팀은 ‘알아서’ 위기를

극복해야

했습니다.

당시엔 모든

항공기 제조사가

실물모형부터

설계했습니다.

그런데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3차원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CATIA)을

설계 전 과정에 적용해 실물모형

제작 과정을 생략했습니다.

참관차 방문한 미국 보잉 관계자는

“CATIA를 만든 다쏘보다

더 CATIA를 잘 활용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계에

8개월이 줄었습니다.

 

개발팀은 모든

휴일을 반납하고

‘월화수목금금금’

근무했습니다.

명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에 연구원 2명이

안타깝게 과로로 순직했습니다.

 

동료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한 연구원은 “몸이 아파도

쉬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1명이 빠지면 더 힘들

동료 생각밖에 없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극도의 긴장과 정신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도 있었습니다.

.

양사 기술팀은

‘회사 앞 나무에 목을 맬

각오로 납기를 맞추겠다’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격한

다짐까지 했습니다.

한일월드컵 4강 진출로

국민들의 자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던

2002년 8월,

시제기 초도비행은

조광제 중령이 탑승한 가운데

비공개로 진행됐습니다.

사고나 실패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언론보도는 한 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2개월 뒤에야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행 행사를

가졌습니다.

2003년 2월 18일,

마하 1.05(초속 360m)로

세계에서 12번째로 국산기

초음속 비행에 성공했습니다.

지난 고생이

떠올랐는지

개발팀은 환호성을 지르고

일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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