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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농이의 일기/아~대한민국

남북분단은 미국의 오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by 도농jk 2020. 9. 10.

두산백과

38선

[ 三八線 ]

요약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분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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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직후부터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으로 인한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정치적 경계선이 되었다. 이 경계선은 순전히 타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책정된 것이며,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민족적 비극과 고통을 안겨 준 한많은 경계선이다.

[책정경위]
남북한간의 경계선인 38선은 애당초 순수한 군사적 목적에 따라 일시적 편의를 위하여 책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임박하였음을 미리 내다본 미국·영국·소련 등 연합국측 3개국 수뇌들은 1945년 2월 4∼11일 얄타 회담에서 전후 처리에 관한 협정을 맺었고, 소련은 대일참전(對日參戰)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협정에서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언급되었다.

① 적절한 시기에 자주독립국이 될 것을 협약한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고, ② 어느 단일국가에 의한 한국의 군사점령은 강한 정치적 반응을 야기할 우려가 있으므로 한국을 구분된 지역이 아니라 단일체로 취급하여 중앙집권제행정원칙에 입각한 군정청(軍政廳)을 조직할 것 등의 내용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그후 연합군 참모장 공동회의에서 전후의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이 분담하여 점령하기로 약정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비로소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여 무조건 항복할 뜻을 밝히자, 미국 국방성은 한반도는 38도선을 기준으로 이남은 미군이, 이북은 소련군이 주한 일본군의 항복과 무장해제 문제를 담당할 것을 제의하여 미국 정부안으로 확정하였다.

그후 소련측과 합의하여 미·소 양군의 군사분계선으로서 38선을 책정하였다. 그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난 것은 1945년 9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부 지시 제1호였다. 여기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국에 있는 일본군은 소비에트 극동군 최고사령관에게, 그리고 38도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합중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에게 항복할 것을 명시하였다.

 

미국은 일본이 태평양전쟁때

끝까지 반항을 하는 일본을 보고 

 

일본에 대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파죽지세의

독일을 격파하는

 

강자가 있었으니 바로 소련였다

 

그래서 미국은 소련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대일본 참전을 요구했지만 소련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차에 미국은 히로시마. 나카사끼에

원자폭탄을 터뜨리니 일본은 옛 모습과는

달리 쉽게 항복선언을  해 버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국의 인원으로

이때다 싶어 한반도의 북쪽을

차치해버리자 

 

이에 겁을 먹은 미국은 한반도 지도위의

38선을 긋어버린다

 

5천년을 이어온 1000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민족앞에 민족의

아픔이 시작된 것이다

 

민족의 힘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겠지만

강대국의 분할, 한반도의 남쪽이라도

먹고 싶었던 이승만의 권력욕에 더해

 

(북의 김일성도 마찬가지겠지만) 뼈아픈

분단이 사실상 시작되었다 

미국은 전시상황의 오판으로

소련을 끌어들인 것인 오판이였고

자기들이 먼저 겁을 먹고 한반도의

38선을 그어 한반도의 남쪽이라도

자신들의 영역안에 포함시킨 것 또한

오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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