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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농이의 일기/여행

아차산의 지명 유래

by 도농jk 2020. 8. 24.

 

고구려 영양왕 때,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 장군이 신라에게 빼앗긴 이 지역을 비롯한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곳 아차산의 산성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곳 주민들은 “아차! 온달 장군이 이곳에서 그만 죽고 말았구나.”라는 의미로 이곳을 아차산이라 불렀다소 한다

 

 

조선 명종(明宗) 때 복술가(卜術家) 홍계관(洪繼寬)이 어느날 자기 명(命)을 점쳐 보고는 아무 날에 횡사(橫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오자 살아날 길을 찾아보니 임금이 계시는 용상(龍床) 아래 숨어 있으면 횡사를 면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홍계관은 왕에게 아뢰어 승낙을 받고 용상 아래 숨어 있었다. 그때 쥐 한 마리가 마당을 지나가자 왕은 홍계관에게 “지나가는 쥐가 몇 마리인지 점쳐 보라” 하였고, 홍계관은 “세 마리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홍계관의 목을 베라 하였다. 홍계관이 끌려 나가 형장(刑場)에 도착하여 급히 점을 쳐보니 한 시간 정도만 버티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형 집행을 조금만 늦추어 달라고 사정하자 형리(刑吏)가 잠시 기다려 주게 되었다. 한편, 홍계관을 형장으로 끌고 가게 한 왕은 그 쥐를 잡아 배를 갈라 보게 하자 뱃속에 새끼 두 마리를 배고 있었다. 홍계관의 신기한 점술에 놀란 왕은 급히 한 신하를 보내어 참형(斬刑)을 중지시키게 하였다.

그 신하가 급히 달려가 형장이 멀리 보이자 집행을 중지하라고 소리쳤으나 잘 들리지 않는 듯 하였다. 이에 손을 흔들며 중지하라는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형리는 사형 집행을 빨리 하라는 신호로 오해하여 홍계관의 목을 베고 말았다. 신하가 왕에게 돌아와 결과를 아뢰자 왕이 “아차 늦었구나” 하며 매우 안타까와 하였다. 그후로 사람들은 이 형장이 있었던 고개를 ‘아차 고개’라 하였는데 그 고개가 곧 아차산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설화는 아차산의 이름이 이미 있은 후 산 이름과 연관하여 홍계관의 일화를 끌어 들인 이야기일 것이다. 일설에는 이 아차 고개가 지금의 노량진동 사육신묘(死六臣墓)가 있는 마루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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